그때 갑자기 지혜 씨가 내 옆에 누워서 다정하게 묻는다.


자기는 미림 씨를 정말 사랑했는데, 미림 씨도 자기도 그걸 집착이라고 생각했구나. 사랑이라는 감정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랑 하나뿐이라고 믿었구나. 그게 당신이라는 사람이었구나!”


나는 지혜 씨가 내 옆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정말 꿈만 같다. 나는 미림을 죽을 것처럼 사랑했고, 그녀와 멋진 미래를 꿈꾸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쓰는 지금 내 옆에는 내 형의 여자였던 지혜 씨가 누워 있다.


내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렸던 신이 잠시 헛손질을 했던 것처럼 나는 내 눈이 찾은 사랑보다는 내 가슴이 찾은 사랑을 발견했다. 미림이 심한 갈증을 유발하는 메마른 사막 같았다면 지혜 씨는 그 사막에 야자수를 드리운 작은 오아시스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림과 한 번도 사귄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내 여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을 정도로 그녀는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내 손아귀를 벗어났다.


내가 누워 있던 병실에서 미림과 가진 짧은 정사가 꿈결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 이후로도 미림과는 도무지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미림과는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인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미림이 좋아했고, 내가 역마살이라고 이름 붙인 그 남자가 갑자기 정치권에 부상해 누나의 애인이 되고, 내 누나라는 연적에서 무참히 패배한 미림은 나게 단 한 마디 말도 없이 파리로 훌쩍 떠나버렸다.


나는 늘 파랑새를 꿈꾸었고, 지혜 씨를 만나서 그 꿈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지.”


나는 엎드려 있던 내 몸을 뒤척여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지혜 씨 쪽을 향한 다음에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 미림이 자기 파랑새였잖아!”


그렇게 말한 지혜 씨는 내 코를 손으로 쥐고 비틀며 크게 웃었다.


그랬었지. 내가 꿈꾸던 파랑새가 미림이라고 믿었어.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미 떠날 채비를 마친 파랑새는 결코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


분별력이 없었던 그때 나는 내 파랑새가 미림이라고 철저하게 믿었고, 그 믿음은 오래된 성처럼 단단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의 파랑새가 나를 떠나 날아간 곳, 프랑스 파리로 거침없이 달려가고 싶었다. 그런데 갈 수가 없었다. 미림을 만나러 떠나려던 공항 출국장에서 나는 출국금지를 당했다. 이유는 너무 간단했다.


김경숙 씨! 동생 김경민 씨, 되시죠? 누님이 구속되셔서 가족들은 아무도 해외로 나갈 수 없습니다.”


가택연금.


그게 지혜 씨가 우리 집을 한 발자국도 못나가고, 내가 지혜 씨의 연인이 된 까닭이기도 했기에 지금은 그 사건을 흐뭇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마르고 말라도 물 한 줄기에 거짓말처럼 되살아나는 땅처럼 미림이 떠나자 죽을 것 같았고, 그녀를 만날 수 없어 나를 막아서는 모든 것이 미워졌다.


김경숙 씨와 관련된 모든 분들의 서신도 제한됩니다.”


보내지 못한 편지. 아마 구구절절했을 나의 편지는 검열자의 비웃음을 달고 반송되었고, 내가 봐도 이건 소설가의 글이 아닌 처절한 외침이었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나뭇잎을 타고라도 가야죠. 어떻게 해서든 말이죠. 경민 씨는 저처럼 갈 수 없는 것이 아니잖아요?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 그곳에 미림이 있어요. 가야죠. 정말 사랑한다면...”


지혜 씨가 의외로 당차다고 느낀 건 그때였다.


경민 씨는 미림이라는 허깨비에 제대로 농락당한 거예요.”


철저하게 정부에 의해 단절되어 버렸고, 미림을 따라 갈 수가 없었다. 나처럼 나약한 사람이 그런 고문을 어떻게 견뎠냐고 할 정도로 난 처절하게 정부에 의해 유린당했다. 지독한 고문을 못 견뎌 살려달라고 목 놓아 외쳤고, 없던 죄도 만들어서 다 불었다. 네 발로 기어서라도 살아서 세상에 속해 있고 싶었고, 나를 고문한 놈들이 나보다 먼저 죽는 꼴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다.


결국 하혈과 극심한 탈장 증세로 병원으로 이송되고 거의 사망선고를 받고나서야, 나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겨우 숨만 붙어서 방에 누워 있는데, 프랑스에서 보낸 미림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런데 편지를 보낸 사람은 미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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