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유레일패스를 이용해 기차를 타고, 당신과 당신의 연인 미림을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긴 열차를 타게 된 건 제가 미림이 되어 당신에게 미림과 같은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싶어서였어요. 그냥 거리에 퍼질러 앉아서는 당신을 결코 떠올릴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미림과 다녔던 그 거리들을 미친년처럼 답사하고 나서 제가 미림인 것처럼 이 영차가 알프스를 통과하기 전에 이 편지를 써서 보내려는 거죠. 미림이 당신과 꼭 가기로 했던 그 알프스 꼭대기로 들어가지 직전에 말이죠.


미림이 파리로 오게 된 건 아마도 제 영향이 컸을 거예요.


저는 당신을 본 적이 없지만, 미림이 수시로 당신 이야기를 해서 마치 당신을 만난 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걔는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안 했어. 그게 그렇게 어렵나?’, ‘걔는 말이지, 나만 보면 어깨를 추켜올려서 자신이 나보다 크다는 걸 과시해. 나는 그게 참 귀여웠어.’, ‘걔는 말이지...’, ‘걔는 말이지..’


미림을 통해 본 당신을 묘사하자면, 늘 짐을 싸서 파랑새를 찾아 어디론가 떠나려는 철부지 어린애 모습이었더군요. 어르고 달래고 싶지만 너무 착해서 양 볼을 두 손으로 비비고 싶었다고 미림이 그랬어요.


전 그런 스타일이 싫어서. ‘미친년! 지랄하고 있네.’, ‘너 같은 년이 왜 그런 애를 만나?’ 라고 쏘아붙이곤 했죠.


살면서 정말 순순한 남자한테 사랑을 받아보는 게 쉬운 일일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그 친구 누나와 만나는데...’, ‘떠나야 했어. 그것 말고 할 게 없었거든.’, ‘그 친구가 상처받는 걸 몰랐어.’


그런데 미림 때문에 당신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저도 어느새 당신이 무척 궁금해지더군요. 항상 우울하던 미림이 당신을 말할 때는 미소를 짓곤 했으니까요.


미림은 커피를 마시다가 커피 잔에 꽂혀서 걘 커피를 다 마시고 커피 잔을 접시 모퉁이에 비스듬히 세워 놓곤 했어,’, 거리를 걷다가도 내가 저 꽃이 예쁘다고 하면, 걘 남의 집 담을 넘어서라도 따주곤 했다니깐.’, 더 웃기는 건 걘 특이하게 내 가슴을 만지고 싶으면 괜히 어깨를 주무르곤 했어’, 전혀 미림답지 않은 이런 말들을 들은 저는 신기하기도 했지만, 미림이 많이 아파하고 있다는 걸 느꼈죠. 당신이 좋아하는 미림의 가슴이 아니라, 미림의 마음이 말이죠.


미림이 몽마르트 언덕에서 관광객에게 그려준 그림들의 얼굴이 너무 당신과 닮았을 거라고 상상하곤 했죠. 전 한 번도 당신의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 불쌍하다.’라고 느끼게 되었거든요. 그러면서 웃기는 게, 미림을 통해서 들은 당신의 불쌍함에 애정이나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꼈어요. 솔직히 말하면 당신이 점점 좋아졌어요.


그렇게 당신의 소설을 읽으며 당신이 너무 궁금했고, 당신의 소설을 사랑했어요. 어쩌면 그건 핑계였는지도 모르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친구의 애인을 그 애인의 소설을 읽고 좋아하게 되었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건 그렇고 미림의 이야기를 마무리할게요.


파리!


뭐랄까? 딱히 할 게 없었어요. 그냥 무료하고 심심했어요. 뭔가 공부를 해야 했는데, 우리 둘 다 도피를 해서 여기 온 거여서 마땅히 할 것이 없었죠. 우리가 할 일이라곤 하루 종일 거리를 쏘다니고, 또 쏘다녀서 우리가 파리 골목을 지도로 그리면 참 잘 그릴 거야.’라고 메마른 웃음을 웃을 정도였죠. 그렇게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다가 오랫동안 침묵했던 적이 많았죠.


왜 당신은 미림을 만나러 오지 않았나요?


당신이 미림을 사랑했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미림을 만나러 와야 했겠죠. 미림이 사랑했던 그 남자 김주호라는 사람도 다녀갔지만, 당신은 한 번도 안 왔죠. 당신이 미림한테 그 남자, 아니 당신이 역마살이라고 부르는 그 사람과 잤냐고 미림에게 물었다죠? 그게 정말 사랑하는 사람한테 할 말입니까?


당신은 이기적인 것을 떠나서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인 것 같다고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미림이 그러더군요. ‘걘 착하다 못해 너무 순수한 거야. 너무 순수하니까 상대편한테도 순수한 걸 강요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이기적으로 보이는 거야!’라고.


당신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전 미림의 그 말을 듣고 배꼽이 빠져라 웃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착한 것도 피해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늦었지만 제 소개를 할게요. 전 여기서 음악을 전공해요. 한 가지 정해서 하는 건 아닌데, 제가 켜 본 악기로 볼 땐 당신은 G코드에 너무 맞는 거예요. 제가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늦잠을 잔 미림이 깨어서 그러는 거 있죠?


! 이게 딱 걔의 느낌이야! 계속 쳐 봐!”


전 그때 제 사촌오빠를 생각하며 피아노를 치고 있었거든요. 제 사촌오빠가 누군지 아세요? 미림의 첫사랑이자, 바로 당신 누나의 애인 역마살이에요. 당신이 그렇게 싫어했던 역마살이 제 사촌오빠라고요.


어쩌겠어요? 제가 그 역마살을 미림에게 딱 한 번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그를 보고 미림이 그렇게 빠져들 줄 몰랐거든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전 미림을 잘 몰랐나 봐요.


이런 잡다한 말보다는 당신이 제일 궁금해 하는 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할게요. 어느 날부터 미림은 침대에만 누워서 당신의 소설만 읽고 또 읽더군요. 같은 소설을 읽고 또 읽으면서 침대에 누워 있던 미림이 어느날 갑자기 그러더군요. ‘유럽에 왔는데, 알프스 한 번은 가봐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이죠.


전 알프스를 많이 놀러 갔어요. 그래도 미림을 침대에서 내려오게 하는는 게 알프스라면 가야겠다고 생각했고, 우린 꿀리지 않으려고 있는 돈 다 털어 최고의 브랜드로 옷을 사 입고 말했죠. ‘스위스 남자들이 대시해도 우린 살짝 웃고 튕기자. 한국 여자의 도도함을 알프스에 남기자!’라고 말도 안 되는 농담도 주고받았죠.


그런 내 친구 미림이 나한테 작별인사 한 마디도 없이, ‘! , 잘 봐!’ 그러더니 알프스 정상이 가까운 계단에서 훌쩍 뛰어 내린 거예요. 내 친구 미림이 아니었으면, ‘! 정말 아름답다.’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미림은 알프스 하늘을 너무 아름답게 날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전 주저앉아서 내 몸에 있는 모든 물들이 아래로 몰린 듯이 소변을 찔끔거리며 난간을 잡고, “나쁜 년! 나쁜 년!”이라고 소리치고 쓰러졌다고 알프스 구조대가 얘기하더라고요.


알고 보니, 미림이 알프스에서 뛰어내리기 전 날, 당신이 정말 불미스러운 죄목을 달고 구속이 되었던 걸 알게 되었더라고요. 그게 바로 미림이 사랑했던 제 사촌오빠 역마살이 주도했다고 우린 믿었으니까요. 미림의 마지막 희망인 당신이 결국 되돌아올 수 없는 걸 알게 되었나 봐요. 그게 참...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어이없는데, 미림에겐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건 사실이겠죠.


물론 실이 아닌 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알게 뭐예요. 미림과 전 그런데 관심조차 없었으니까요. 어쨌든 이 편지를 받는 날, 저는 이미 귀국했을 거예요. 이렇게 편지로는 다 할 수 없는 미림이 당신하게 남긴 이야기를 당신에게 직접 전하기 위해서 말이죠. 곧 봅시다.

 

미림의 마지막 친구 승희.

 

'장편소설 > 파랑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파랑새 17  (0) 2018.04.04
소설) 파랑새 16  (0) 2018.03.21
소설) 파랑새 15  (0) 2018.03.14
소설) 파랑새 14  (0) 2018.03.06
소설) 파랑새 13  (0) 2018.02.23
소설) 파랑새 12  (0) 2018.02.19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