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가을은 매우 추웠다. 3의 가을이 끝나간다는 초조함에 가까운 친구 몇 명이서 근교의 계곡을 찾았다. 모두들 어렵게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서 온 산행이었다. 공부에 지친 머리를 잠깐 식힌다는 목적이었지만, 마음이 들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텐트를 치고 버너로 밥을 해서 먹고는 황금 같은 해방감을 느끼며 가을 산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었다.


대학입시는 어느새 백일 후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그래도 낮에는 만사를 잊고 산 속을 거닐거나 음악을 듣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조그맣게 피워놓은 모닥불 가에 모여 소주와 맥주를 마셨다. 모닥불은 꺼질 듯 말 듯 위태롭게 타고 있었고, 그들의 마음도 그 모닥불처럼 가물거렸다. 저녁식사 후 계속된 술기운 탓인지 저마다 한 마디씩 울분을 토해냈다.


"미쳐버릴 것 같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는데 공부는 하나도 해놓은 것이 없고……. 머릿속은 텅 비어버리고, 마음은 바쁘기만 하고, 공부는 잘 되지 않고.”


먼저 말머리를 꺼낸 사람은 그래도 반에서 제법 상위권에 속해 있는 현석이었다. 현석은 몇 잔 마시지 않은 술에 혀까지 돌아가며 얼굴도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개소리하고 있네! 너야말로 공부 잘하는 축에 드는 놈 아냐? 나 같은 놈은 대학 가기가 비행접시 보기보다 더 어렵다는 거 아니냐. 애초부터 기초가 딸리는데다가 공부라고는 때려죽여도 하기 싫으니…….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창안하신 아이디어가 체육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시키려는 거 아니니. 그것도 남들이 잘 하지 않는 특기. 그게 뭐냐? 바로 골프와 승마 아냐! 맨날 다 늙어빠진 노인네들이랑 잔디 밟기 하는 거. 말 대가리와 실랑이하는 거. 그게 내가 대학에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제길!”


아버지가 꽤 큰 공장을 운영한다는 우성이 담배까지 한 대 피워 물고 내뱉은 소리였다. 우성은 껌을 씹듯 담배필터를 질겅질겅 물어뜯고 있었다.


"! 지랄하고 자빠졌네. 넌 그래도 운 좋은 놈이야. 늘씬하게 빠진 캐디들이랑 노닥거리고 장군처럼 말을 타며 네 녀석의 덜떨어진 우월감을 뽐내겠지만, 나 같은 약골은 운동도 못하고 오직 공부뿐이라고. 게다가 우리 집엔 너네 집처럼 골프나 승마를 시킬 만 한 돈도 없어. 학교 가면 선생이 공부하라고 닦달하지. 집에 가면 엄마가 새벽까지 붙어 앉아 잠도 못 자게 하지. 이건 정말 미칠 지경이라고.”


약골 영준이도 질세라 침을 튀기며 울분을 토해냈다. 아이들의 자기비하적인 넋두리는 계속 이어졌고, 강재도 그들과 더불어 뭐라고 지껄였던 것 같았다. 그렇게 저마다의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밤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깨는 사건이 생겼다.


", 이 새끼들 뭐야? 고삐리 아냐! 쥐새끼만 한 놈들이 벌써 술 처먹고 잘들 논다!”


얼른 보기에도 불량기가 있어 보이는 녀석이 어둠 속에서 큰 덩치를 흔들며 불쑥 나타났던 것이다. 녀석도 술이 꽤 많이 취한 상태였는데, 손에는 굵은 통나무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너는 뭐 말라비틀어진 개뼈다귀냐? 너나 술 처먹었으면 집에 가서 자빠져 자기나 할 일이지, 남이야 술을 처먹든 담배를 피우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재수가 없으려니 별 놈이 다 시비네.”


그런 와중에 제일 먼저 앞으로 나선 애가 우리 중에 술이 제일 많이 취한 현석이었다. 검도가 유단자인 그는 학급반장이면서 꽤 의협심까지 있는 편이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사내는 그렇게 말한 것과 동시에 몽둥이를 휘둘렀다. 무방비 상태로 서 있던 현석이 사내가 휘두른 몽둥이에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고 신음을 쏟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검도 유단자인 현석도 술이 많이 취해서인지 일격에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 자식들! 한번 죽어볼래."



녀석은 현석을 쓰러뜨리고 기고만장해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휘적휘적 우리들 쪽으로 다가왔다. 이미 다른 아이들은 모두 모닥불 가에서 멀어진 후였다. 나 혼자 모닥불 옆에 서 있었다. 녀석이 나를 발견하더니 성난 멧돼지처럼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녀석은 뚝심만 믿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내게로 다가왔다.


사정거리에 놈이 들어오자, 나는 놈이 휘두르는 몽둥이를 왼손으로 막아내며 올려 차기로 턱을 가격했다. 턱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녀석이 몽둥이를 놓치며 비틀댔다. 비틀거리는 녀석의 관자놀이를 정권으로 내리찍었다. 녀석은 썩은 나무 넘어가듯 맥없이 쓰러졌다.


녀석이 넘어지자, 제일 먼저 달려든 것은 머리통을 감싸 쥐고 뒹굴던 현석이었다. 현석은 발로 녀석을 짓이기기 시작했다. 멀찍이 물러났던 다른 아이들도 가세해 이미 전투력을 상실한 놈의 몸뚱이를 마구 짓이겼다.


한참을 그랬을까. 갑자기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엉겁결에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니, 현석이 건달이 들고 있던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좀 전의 앙갚음으로 늘어진 건달의 머리에 일격을 가한 모양이었다. 그 소리에 놀라 아이들이 그제야 발길질을 멈추었다.


내가 다가가 발로 툭툭 건드려보니, 녀석은 미동도 없이 사지를 벌리고 뻗어 있었다. 죽었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쳐갔다. 뒤로 먼저 물러난 것은 약골 영준이었다. 영준이에 이어 나머지 아이들도 건달의 늘어진 몸뚱이로부터 슬슬 뒷걸음을 쳤다. 아이들은 모두 시체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넋을 잃고 주저앉아 있었다. 영준은 겁을 먹어 온몸을 덜덜 떨었다.


"묻어버리자.”


그 말을 꺼낸 것은 현석이었고, 구덩이를 파기 시작한 것은 우성이었다. 우리들은 늦가을의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구덩이를 팠다. 영준은 겁먹은 눈으로 혹시 누가 볼까 봐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구덩이가 얼추 파지자, 시체를 들어서 구덩이 쪽으로 옮겨갔다.


그때 죽은 줄 알았던 시체가 버둥거렸다. 마치 묻히기를 거부한다는 듯이 부들부들 경련하는 시체를 내던지고 모두 혼비백산하여 달아나 버렸다. 죽기 직전의 마지막 몸부림인 양, 몸뚱이는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천천히 다가가 경련을 일으키는 녀석의 목을 발로 힘껏 눌러버렸다. 이미 죽은 자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생각이었고, 내 생각대로 녀석은 곧 경련을 멎었다. 놀라서 주저앉아 있는 친구들을 대신해 나 혼자서 시체를 질질 끌어다가 구덩이에 묻고 흙으로 덮었다. 그리고는 땅을 평평하게 하려고 미친놈처럼 그 위에서 껑충껑충 뛰었다.


그 후 우리들은 각자의 가슴에 말 못할 비밀을 숨친 채 의도적으로 서로를 피했고, 그 일 이후로 어떻게 지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외면한 채 살아왔던 것이다.


가끔씩 나는 심하게 경련하는 몸뚱이와 허옇게 드러난 흰자위, 그리고 녀석이 게워내는 게거품들의 악몽에 시달렸고, 그런 것을 떨쳐버리기 위해 복싱 도장을 찾아 난폭하게 샌드백을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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