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태 부장의 지령을 받은 것은 저녁 아홉 시경이었다. 자혜와 소파에 기대어 텔레비전 드라마에 빠져 있었다. 그즈음 한참 인기를 끌던 코믹성 멜로드라마였다. 자혜가 하도 재미있다고 해서 같이 보고 있는 중이었다.


전화를 건 장 부장은 서울 근교의 한 절을 지적했다. 그 절로 가서 어떤 사람 하나를 납치해 오라는 것이었다. 절에 있는 사람까지 잡아오라니 이젠 별 희한한 곳까지 다 가보는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하면서 나는 자혜에게 어설픈 핑계를 둘러대고 밖으로 나왔다.


차를 급히 몰아 서울을 빠져 나왔다. 늦은 시각이라 교통의 흐름은 그런 대로 원활했다. 그런데 서울과 경기도 경계에 검문소가 하나 있는 것이 문제였다. 사내를 잡아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검문소를 통과하기도 그리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사내를 납치하는 것이 먼저였다.


산의 밑의 후미진 모퉁이에 차를 세우고 자루 하나와 끈을 준비해 산을 올랐다. 플래시가 있어 길을 오르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절의 나지막한 담을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객사가 다섯 개나 있다는 점이었다. 우선 맨 가장자리 쪽의 방부터 살며시 열었다. 그 방의 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예상대로 빈방이었다. 두 번째 방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방학 중에 고시 공부를 목적으로 산사에 들어가 있던 경험에 의하면, 대개의 그런 미닫이문은 안에서 쇠고리 하나 정도 걸치는 것으로 문을 잠그게 되어 있었다. 문틈으로 칼을 집어넣어 살짝 들어 올리니, 쉽게 고리가 벗겨졌다. 플래시로 벽을 비쳐보니, 고시용 법서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사내는 제외했다.


살며시 문을 닫고 나와 다음 방으로 갔다. 역시 고리가 걸려 있었지만 쉽게 벗기고 들어갈 수 있었다. 사내의 나지막이 코고는 소리가 구석에서 들려왔다. 플래시를 벽에 비춰보았더니 옷가지 몇 벌뿐이었다. 일단 그 방을 나왔다. 다음 방은 세 번째 방처럼 뜨내기인 듯 한 사내가 자고 있었다. 맨 마지막 방은 창고처럼 잡동사니들을 모아두는 방이었다.


그렇다면 세 번째와 네 번째 방에 잠들어 있는 사내 중 한 명이 납치해야 할 인물이었다. 하지만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플래시를 비출 수는 없었다. 만약 먼저 확인한 사내가 눈을 떴을 때, 데려갈 사내가 아니라면 곤란해질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하라는 명령이었다.


한참 골머리를 썩이다가 떠오른 생각에 나는 스스로 고소를 금치 못했다. 사내들의 주머니를 뒤져 신분증으로 나이를 확인하면 쉬운 일인데, 그 생각을 못해 쩔쩔맸다고 생각하니, 나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에 걸린 두 사내의 옷가지를 뒤져 신분을 확인하니, 한 사내는 이십대였고. 한 사내는 삼십대였다. 나는 삼십대 사내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들어가 다짜고짜 입에 강력 테이프부터 붙였다. 깨어나 꼼지락대는 사내를 엎어놓았다. 사내의 등을 무릎으로 힘껏 누르며 손과 발을 단단히 묶었다. 사내가 묶인 채 사력을 다해 버둥거렸다. 수도로 목덜미를 힘껏 내리쳤더니 사내는 곧 잠잠해졌다. 사내를 포획한 짐승처럼 자루에 집어넣어 어깨에 들쳐 메고 담을 타넘는 대신에 문을 살며시 열고 밖으로 나왔다.


산을 내려와 사내가 든 자루를 차의 뒷좌석에 밀어 넣고 차를 몰았다. 일단 검문소가 보이는 길모퉁이에 차를 세우고 다시 사내가 든 자루를 들쳐 멨다. 자루를 어깨에 멘 채, 검문소를 멀리 빙 돌아 검문소에서 한참 떨어진 길섶에 자루를 내려놓고 다시 한 바퀴 빙 돌아 차가 있는 곳으로 왔다.


차가 검문소에 이르자, 헌병은 면허증을 검사한 뒤, 트렁크까지 열게 했다.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이 확인되자, 헌병은 거수경례를 부치며 통과를 허락했다.


나는 안도의 숨을 쉬며 차를 빠르게 몰아 자루를 내려놓은 곳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자루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분명히 그 자리에 내려놓고 땅에 표시까지 해 둔 자루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플래시를 켜고 사방을 뛰어다니며 정신없이 헤맸다. 다행히 자루는 원래 위치보다 훨씬 떨어진 곳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내가 검문소에서 지체하는 사이 사내는 정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공포에 질린 사내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여기까지 굴러온 모양이었다. 나는 아직도 꿈틀대는 사내를 발로 몇 번 짓이긴 후 트렁크에 처넣었다.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천종수가 초조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 이렇게 늦었어?”


천종수가 짜증부터 냈다. 나도 괜히 심사가 뒤틀렸다.


"누군 놀다 온 줄 알아? 그렇게 잘할 수 있으면 이제부터 너 혼자 해 봐!”


나는 자루를 땅바닥에 험하게 굴렸다. 그 바람에 기절한 사내가 다시 정신이 들었는지 자루 속에서 꿈틀댔다. 꿈틀대는 자루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나는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겁 많은 천종수가 어떻게 꿈틀대는 사내를 트렁크에 어떻게 싣고 갔는지는 나중에 만나서도 얘기해주지 않았다.


하여튼 그 절에서는 한동안 난리가 났겠지만 갑자기 사라진 사내를 무슨 수로 찾겠는가? 그 이후로 그 사내는 어찌 되었을까? 무슨 일로 자다가 한밤중에 납치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을까?


갑자기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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